Thursday, August 27, 2009

SAT의 역사

SAT의 역사

SAT(Scholastic Achievement Test)는 1920년대의 하버드대 총장인 제임스 브라이언트 코난트 (James Bryant Conant)가 미국 전역의 학생들에게 당시의 일류대학 즉 아이비리그를 입학할 수 있는 자격을 주기 위해 만들어졌다.
코난트 총장은 하버드와 예일과 프린스턴 대학 등의 입시고사가 라틴어와 헬라어 위주로 짜여 있기 때문에 오직 미국 동부에 위치한 명문사립고를 재학하지 않고는 자신들의 대학에 들어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주시했다. 당시 대부분의 공립고등학교에서는 실리적인 학문을 하였기 때문에 고전언어가 없었다. 또 오직 부유한 계층의 자녀들이 이런 비싼 사립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중세시대의 혈통의 “귀족주의”가 돈의 “귀족주의”로 세습된 것을 우려하여 능력을 위주로 학생들을 뽑고자 하였다.
고등학교마다 교과과정이 틀리기 때문에 코난트 총장은 챈시(Chauncey)학장에게 교과과정과 지역과 출신학과와 경제능력에 상관없이 가장 똑똑한 학생들을 선출하는 프로그램을 만들기를 원했다. 챈시학장은 프린스턴 대학의 심리학 교수인 칼 브라이햄 (Carl Brigham) 을 만나고 브라이햄 교수는 이미 미국 육군을 위한 지능시험을 만들었고 이를 바탕으로 학생들의 수학능력을 평가하는 시험으로 SAT (Scholastic Aptitude Test)를 만들었다.
여기에서 주의할 것은 A에 해당하는 Aptitude는 지능이나 능력을 의미하고 지금의 SAT의 A에 해당하는 Achievement (성취)와는 다른 의미를 가진다. 흥미로운 것은 SAT의 A에 해당하는 단어가 바뀌어졌지만 20세기초기의 문제들과 21세기의 문제들이 아직도 유사하다는 점이다. 또 SAT는 대부분 실력을 평가하는 시험으로 알고 있지만 원래의 용도는 학생이 대학에서 얼마나 잘할지를 예상하는 예상능력시험이라는 것이다.
브라이엄 교수는 1926년부터 SAT의 예상능력을 평가하기 시작하고 1933년에 SAT가 학생들의 학문적인 성공을 예상하는데 정확하다는 평가를 내리고 챈시 학장과 코난트 총장은 그 결과를 바탕으로 하버드대학의 장학생을 뽑는데 이 시험을 사용하고 다른 아이비리그대학들도 동참시키고 이 장학생시험이 대학입학시험으로 변한다.
챈시학장은 ETS(English Testing Service)의 초대회장으로 1946에 취임하고 그의 지도아래서 1950년대에는 400여 개의 대학교에서 대학입학시험으로 자리잡게 되고 현재 210만 명의 학생들이 매년마다 이 시험을 보고 미국대학의 가장 대표적인 대학입시고사로 자리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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